[옷소매 붉은 끝동] 08화까지의 이야기
덕임의 감정선을 따라 읽는 이야기
근데 이제 사족과 상상을 곁들인
제 아무리 달콤하다 한들,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이 잔혹하다.
궁녀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주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항의 한 마디 할 수 없고,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하루아침에 궐 밖으로 내쳐지는 한낱 종. 덕임은 감히 내보일 수 없는 마음까지 있어 그 마음이 너무 무겁다. 이대로 괜찮을까? 어느 때로 돌아가면 괜찮아질 수 있을까.
그날은 좋은 날이었다. 세손 저하께 올릴 반성문도 완성했고, 어려워 막막했던 대학연의보 필사를 세손 저하의 서연 소리를 들으며 무사히 해냈으니 말이다. 덕임은 저가 헤매던 부분을 때마침 세손 저하께서 공부하고 계시다니 정말 달콤한 운명 같았을 것이다. 그때 서고의 문이 열리고 어떤 사내가 들어왔다.
신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오질 않나. 알 수 없는 질문을 쏟아내고 고작 닷냥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묘하게 강압적인 말투, 맥락 없는 질문과 하대에 덕임은 화가 났다. 도대체 동궁의 궁녀를 뭐로 보는 거야. 돈으로 매수하려는 것도 어이없고 그게 겨우 닷냥인 것도 우스웠다. 그렇지만 돈이 무슨 죄야. 분명 한 번 돌려줬고, 바닥에 떨어진 돈은 임자가 없으니 주워는 왔다.
다음날 그 사내가 또 서고에 왔다. 이번에는 제조상궁 마마님께 받은 노리개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 덕임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사내의 강한 힘을 느꼈고 그 위압감이 무서웠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저도 정 5품 상궁까지는 될 수 있는 어엿한 궁인이니 말이다. 해명을 하라니 해명도 해주었다. 억울하기는 싫어서였다.
그 사내는 시강관이었다. 그래 어쩐지 목소리가 낯익다 했어. 근데 자신을 홍덕로라 한다. 응? 겸사서 나으리는 한성 제일가는 미남자랬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미남인 것은 맞지만 소문처럼, 고운 느낌의 꽃미남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당상관도 아니고 정 6품이 옥관자를 쓰다니 언제 한 번 경을 치겠구나 생각했다. 재수 없는 놈.
축제 준비를 마치고 동궁의 서고에 온 덕임.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 "밤 중에도 필사일을 하느냐" 묻는 그 사람은 겸사서였다. 책을 읽지 말라니. 아니 책을 읽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또 자기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지 덕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저 사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캄캄한 서고에서 불을 밝히지도 않고 어찌 저리도 쓸쓸하게 있었을까. 책을 읽지 말라며 덧붙인 말과 그 눈빛이 신경 쓰였다.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에 영희를 붙들고 그 사람에 대한 욕을 퍼부었다. 덕임은 알지 못했다. 그 사람에 대한 역정이 평소답지 않다는 것을. 그 밤, 그 사람은 화가 난 듯했지만 툭 치면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대체 무슨 심정이었기에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데? 덕임은 어째서 그 사람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 역시 답답하다. 대체 궁녀들은 이런 겸사서를 왜 좋아하는 걸까?
"무슨 봄바람? 말 끝마다 칼바람이던데"
세손 저하께 올린 반성문이 통을 받지 못했다. 잔인하게도 붉은 줄만 가득 남은 반성문을 손에 쥐니 슬펐다. 틀린 부분을 고쳐 다시 써오라니... 어떻게 써야 할까 막막하던 그때 눈앞에 보인 한 사람. 바로 세손 저하의 측근인 겸사서 나으리였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자 매일 물을 마신다는 우물가에서 물을 떠 왔다. 돌아오는 대답은 "왜 모르겠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 그래 그럼 그렇지. 재수 없는 놈이 하루아침에 변했을 리가 없었다.
이후로 반성문이 네 번이나 불통을 받는 동안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도 제법 쌓였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 몰아붙이거나 화를 내지 않고도 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싸우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겸사서는 덕임을 하대했고 웃전인냥 굴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호랑이 책을 왜 그리 찾나 했더니, 도성에 내려온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이라면 덕임도 열심히 도와주고 싶었다. 당신도 참 대단하다. 무관도 아닌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이니 나라도 해야 한다는 당신이. 이제 덕임은 겸사서의 날 선 말투에 익숙해졌고 차가운 말속에는 따뜻한 심성이 있다는 것도 안다.
예정에 없던 번을 서는 중 겸사서가 가삐 찾아왔다. 책을 읽는다고 그리도 뭐라 하더니, 이제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이다지도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덕임은 침착했다. 겸사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어야겠다. 사람들을 위해, 우리 궁녀들을 지키기 위해 겸사서를 도와야 했다.
덕임은 사람들을 무사히 대피시키고 사라진 생각시를 찾으려던 중 호랑이를 마주했다. 이번에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 겸사서가 왔다. 나를 구하러, 나를 지켜주러. 어쩌지, 너무 놀라 그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와버렸다.
말이 안 된다.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잡아 사람들을 구한 세손 저하와 익위사들이 처벌을 받는다니. 그렇다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겸사서 나으리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럴 순 없다. 세손 저하께서 용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함께 벌을 받고 있을 겸사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한순간 겸사서 나으리처럼 보였어"
그들이 용서 받을 수 있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야 했다. 그때 상감마마의 손녀분들께서 세손 저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책을 바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책을 들고 임금님을 알현한 것은 덕임이었고, 그렇게 찾게 된 대전에서 석고대죄 중인 세손 저하를 뵈었다.
주상 전하를 알현하고 나오니 모든 긴장이 풀렸고 대전에서 받아먹은 떡의 체기까지 더해 정신을 잃었던 덕임이었다. 세손 저하께서 용서를 받으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럼 이제 겸사서 나으리도 무사하시겠지? 그가 무사한 것을 제 눈으로 보고 싶어 무작정 달렸다. 서고에 가면 볼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서고에서 한참을 기다린 덕임이었다.
겸사서 나으리는 사실 겸사서가 아니라 세손 저하셨다. 왜 사람을 속여?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반성문의 일도 그랬다. 불통을 받아와 하소연하는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억울했지만 어디 말할 수 있는 데도 없었다. 그저 상처 받은 덕임의 마음만 남은 것이다.
계례식이 곧이다. 짐을 정리하려 들른 서고에서 세손 저하를 만났다. 그저 알겠다 대답하고, 그저 명을 따라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니... 성가시게 하지 말라니... 내가 뭘 했다고 저러는 걸까. 날 속인 건 당신이면서.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산에게 실망한 덕임. 실망도 기대한 바가 있어 드는 마음일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눈치 없이 먹을 잘 갈아버렸다. 졸지에 동궁의 지밀나인이 되어 세손 저하를 모시게 되었다. 그간 세손 저하를 보필했던 나인들이 겪은 일을 듣고 나니 두렵다. 뼛속 깊이 궁녀를 싫어한다는 동궁께서 이미 책 잡힌 나는 또 얼마나 구박하실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세손은 덕임이 겸사서로 알고 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과 날카로운 말투로 온정을 감춘 사람이었다. 화완옹주에게 당하고 있던 덕임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하여 구해줘서 고맙다 말할 사람은 덕임이었다. 그러나 고맙다고 먼저 말한 것은 산이었다. 제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당신의 백성이 될 사람이라 아뢰었던 걸 기억하는 걸까. 여인은 세심하다고? 내가... 세심한가...?
안돼, 신경쓰지마. 기대했다간 틀림없이 실망할 거야. 말은 자신에게 좋은 면을 기대하는 산이 실망할 것이라 한 것이지만 덕임의 속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산의 마음에 대한 기대를 심었다 실망을 하게 될 자신이 두려웠다.
혜빈 자가의 명을 받고 세손 저하의 뒤를 밟았다. 정말 세손 저하께서 기방에 출입하시는 걸까. 저하가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직접 확인 하고 싶었다. 그때 덕임의 목을 향한 칼날과 함께 나타난 홍 겸사서. 이번에도 위기를 마주한 덕임을 구해준 것은 산이었다.
왜 겁이 나지 않는걸까. 산은 이 나라의 국본. 당연히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인데. 덕임은 그간 산과 함께하며 산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산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 덕임은 자신 안에 생겨버린 산을 향한 믿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를 책망하며 흔들리는 산의 눈빛도 읽었다.
겸사서로 알고 있던 사람의 정체가 세손 저하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스스로 마음의 선을 그어놓고 한 발짝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편하게 웃고 대화를 하다 보니 덕임은 자신도 모르게 산을 겸사서로 대하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덕임을 보고 산은 말했다. 나 또한 너와 함께한 시간이 특별했다고.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끌어당기면 가야 하고, 밀면 멀어져야 해. 생각도 의지도 필요 없어. 그게 궁녀야."
홍 겸사서와의 대화에서 덕임은 깨달았다. 지존이 되실 그분의 마음이 나를 향해 있다. 허나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한낱 궁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려고, 더 이상 마음이 깊어지지 않게 조심하려고 하는 덕임의 마음도 몰라주고 산은 자꾸만 달려와 제 손을 잡는다. 마음을 감추지도 않는 당신이 제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지 아실까요. 덕임은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싶다. 제 마음도 그렇겠지.
내 마음은 그리 들쑤시던 사내가 이번에는 나를 할퀴고 있다. 저하의 옆자리, 명문 사대부가의 여식도 아닌 내가 넘볼 자리가 아니다. 넘본 적도 없기에 더 억울하고 화가 났다. 고개를 들고 바라본 산의 얼굴도 덕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덕임은 제 마음이 받은 상처가 더욱 진해 산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나 그에 화낼 자격이 없는 덕임이었다. 또 화가 나도 말할 수 있는 데가 없어, 애먼 돌만 던졌다. 하지만 산을 향한 마음이 이미 깊어 예전처럼 마음껏 돌을 던질 수도 없었다. 그저 이 마음을 꼭 쥐는 수밖에 없다.
금족령이 내려왔다. 그 좋아하던 책을 모두 빼앗긴 채로 덜컥 닫기는 문 너머 산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나라도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 가까이 있고픈 마음에 번을 자처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선뜻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시를 해석하는 것이라도,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한 번뿐인 계례식을 망쳐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이 사람에게는 더욱 내뱉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때 산이 먼저 말해주었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덕임은 산의 다급한 마음을 알지만 말을 멈추듯 그렇게 멈춰서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세손 저하께서 눈물을 흘리신다. 주상 전하께 뺨을 맞고도 아무 말 않는 산을 보니 알겠다. 그 눈물은 처음이 아니다. 그렇게 그가 무너지는 순간을 지켜보며 산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더 커졌다.
힘이 생긴다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산의 말을 들으니 결심이 섰다.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우선 저하의 금족령을 풀어야 했다. 그래서 산을 대신에 동덕회에도 참석하고, 중궁전을 설득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런 덕임에게 산은 이름을 불러주었다. "덕임아" 처음으로 불리운 그 이름으로 덕임의 뺨은 붉게 물들었다. 외면하려 해도 자신 안에 자리한 마음은 덕임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타난다.
중전 마마의 도움으로 세손 저하의 금족령이 풀렸다. 산이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려 뛰고 또 뛰었다. 문 밖으로 나선 산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절을 올리며 장난치는 덕임을 보는 산의 눈초리에 애정이 담겨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
덕임은 산의 목욕 시중을 들 수 없었다. 덕임에게 산은 그저 웃전이 아니라 사내였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사내의 몸도 놀라운데 그 몸이 세손 저하의 몸이라니. 뜨거운 물보다 더 뜨거운 산의 숨결에, 그보다 더 뜨거운 제 마음에 감히 눈도 맞추지 못했다. 서상궁 마마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덕임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것이다.
겨우 밖으로 나온 덕임은 차가운 공기조차 느끼지 못했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방금 본 산의 모습을 지워낼 수 없어 큰일이었다.
별당으로 세손 저하께서 오셨다. 직접 돌아가신 세자 저하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임은 아버지가 세자 저하의 익위사이긴 했지만 사도 세자의 일은 잘 몰랐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어린 시절의 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덕임은 저도 모르게 산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이 들킬까 봐 다급하게 시선을 거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둘 들려주는 산의 모습에 덕임은 더욱 심란해졌다. 여전히 이 사내는 덕임이 어디까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보폭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산이 제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핀 배롱나무의 꽃이었다. 아주 활짝 피어났고, 그 색은 제 소매 색처럼 몹시도 붉었다. 산은 그 광경을 덕임에게 선물이라도 하듯 덕임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꽃이 이제야 피어난 것에 의미가 있을까 묻는 산을 보며 덕임은 깨달았다. 이 꽃처럼 당신의 마음도 활짝 피어났구나. 두려운 제 마음은 모른 채 그저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구나. 이처럼 산의 마음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덕임은 점점 더 두려워졌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제 마음을 헤집어 놓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산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고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산이 그렇게 다가오는 동안 덕임의 마음은 속절없이 커져만 간다. 그의 손이 스쳐간 이마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좋을까.
숨겨둔 마음에 대한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모든 것이 제조상궁의 계획이었다. 덕임이 서고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세손이 배우는 학문을 필사하게 된 것도.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분명해졌다.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내보여서는 아니 될 연정이었다.
달콤한 운명인 줄로만 알았다. 너무나 위험하고 어려운 운명이라 더 달콤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거짓인 것 같아 마음이 길을 잃었다. 나뭇잎배에 마음을 실어 보내고 싶었다. 제 옷자락이 이미 젖어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제 마음에 자리한 나무는 이미 뿌리를 깊이 내린 것을 알지 못하고.
그 틈에 분명해졌다. 산은 여전히 제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이제는 모르는 척 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다. 그 마음을 받는 순간 찰나라도 기뻐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거절하고 싶었다. 감귤이든, 당신의 마음이든 감히 받들 수 없으니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에서 가장 차가운 말을 고르고 골라 꺼냈다.
뒤돌아 멀어지는 산을 보며 덕임은 마음이 아렸지만 한 편으로는 안심했을 것이다. 제발 그리 멀어지소서. 내게 달려오지 마시고 그리 등을 보이며 멀리멀리 떠나 주소서. 소인이 이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감히 넘볼 수 없는 당신을 마음에서 지워낼 수 있도록.
자꾸 시험에 드는 기분이다.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그분은 눈앞에 있다. 또 신경 쓰이는 그 모습으로 나타났다. 화가 난 듯 하지만 툭 치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 위태로운 모습. 무슨 생각을 하냐 물으니 나를 생각하고 있다한다. 그런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너의 마음까지 모두가 내 것이냐고. 이미 제 마음을 모두 줘버렸기에 더욱이 감춰야 했다.
덕임은 무서웠다. 산이 가까이 다가와, 숨겨둔 제 마음이 드러났을까 긴장했다. 들켜서는 안 돼. 부러 모질 게 굴었지만 저의 날 선 말과 행동에 상처 받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제 점점 더 선명해진다. 제조상궁은 세손 저하께 해가 될 사람이다. 그러니 더욱 이 자의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후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이 그분을 향했던 것이 만약 당신이 의도한 것이래도 상관없다. 나는 후궁이 되지 않겠다는 내 선택과 의지를 지켜낼 것이다.
다시 한번 위기에 부닥친 덕임. 주상 전하께 하사 받은 여범이 문제가 되었다. 역시 산은 덕임을 구하러 왔다. 산이라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던 덕임이기에 화가 났다. 그리고 섭섭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산이, 자신을 유배 보내려는 하는 세손 저하가.
주상 전하를 직접 알현하고 임금님의 기억이 온전치 않은 것을 깨달으며 산이 유배형을 청했던 이유도 눈치챘다. 그리고 세손은 주상 전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살리려고 이 나라의 국본이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 군주의 시간을 조금만 내어달라고. 부디 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궁녀로 살기 정말 쉽지 않네..."
이리도 매일 목숨이 걸린 일이 일어나다니. 궁녀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감히 내보일 수 없는 마음까지 있어 그 마음이 너무 무겁다 생각하던 그때 산이 다가와 말했다. "왕세손으로 사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나만큼 힘든 걸까.
그날 대전에서 감싸주고 지켜주어 기뻤던 그 마음을 겨우 꺼내 말했다. 그러자 저하께서 영빈 자가의 조문을 다녀왔던 그날의 일을 하문하셨다. 함께 있었던 배동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기억을 더듬어 꺼낸 그 이름은 '산 祘'.
"저하셨군요"
그날 내가 만난 것이 당신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날의 일이 당신의 기억에도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너였구나" 말하는 산의 목소리에서 그의 마음이 들렸다. 나를 찾고 싶었다는 마음을, 내가 그리웠다는 그 마음을. 이 안도감이 좋아서, 그 품이 따뜻해서 눈을 감고 온전히 그 사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저하를 향한 마음을 없는 것으로 되돌릴 순 없을 것이라고. 아무리 모른 척하고, 아무리 숨기려 했어도 우리의 마음은 같았다.
-
Daboa
'REVIEW >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빠르게 흐르고 두텁게 쌓인다 (0) | 2021.12.20 |
---|---|
미워했던 왕과 사랑하는 할아버지 (0) | 2021.12.19 |
그의 눈물은 그녀의 눈물처럼 떨어졌다. (0) | 2021.12.13 |
산이 덕임에게 준 것들 (0) | 2021.12.09 |
제조상궁 조씨의 이야기 (0) | 2021.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