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제조상궁 조씨의 이야기

다보아 2021. 12. 5. 14:04

 [옷소매 붉은 끝동] 08화까지의 이야기

 

확실한 명분과 분명치 않은 일.

 

제조상궁 조씨는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대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서두를 것 없다, 그리 서두를 일은 아니다. 수년을 공들여 준비하더라도 괜찮았다. 결국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조금은 급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듯 군다. 여든이 넘은 금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본인의 감을 믿었다. 

 

그렇다면 제조상궁이 꿈꾸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원하기에 그리 오래도록 일을 도모하였을까. 자신이 통솔하는 궁녀들에 대한 강한 연민과 책임감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저 궁녀를 지키기 위한 상궁의 노력이라기에는 하는 일이 지나치지 않나.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산과 대립하는 세력의 조력자이자 숨겨진 흑막인줄 알았다. 홍정여의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제조상궁을 보며, 궁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홍정여를 이용해 해내고 있는 인물로 보였다. 조씨는 신중하게 자신의 일을 진행했다. 스스로가 사도세자의 패악에 상처받은 궁녀이기에. 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명분도 확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뚜렷한 명분에 비해 조씨가 하려는 일은 분명치 않다는 점이었다. 

 

제조상궁 조씨는 세손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자신을 위해 뜻을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평범한 듯 보이나 속사정은 시끄러운 궁의 일상에서 어린 덕임을 만났다. 저 자그마한 아이가 어찌나 영특한지 금새 눈에 들어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 좋구나. 내 너로 정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아이야. 너는 내 사람이 되어, 나를 도와주어야겠다. 두고 보렴 내가 너를 어찌 키워낼지. 나는 몹시도 기대가 되는구나. 너는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될 아이야. 그 기대감이 썩 기분 좋구나. 

 

때마침 덕임에게 보여줄 좋은 자료가 생겼다. 보고 느끼면 너도 알겠지. 보잘 것 없는 궁녀의 삶보다 저 화려한 영광이 갖고싶지 않냐 물어볼 좋은 기회다. 

 

너는 참 고운 얼굴을 지녔다. 영특하기까지 하니 내 어찌 너를 마다하겠니. 분명 너는 더 고와질 것이고 꿈을 품는다면 너도 분명 저리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씨는 어린 덕임의 턱을 어루만졌다.

 

 

"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 살아생전 어떤 권세를 누렸든 궁녀의 마지막은 그처럼 덧없고 초라하지. … 보아라. 저것이 승은을 입은 여인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 모든 궁녀가 꿈꾸는 마지막이야. 너 역시 저리 되고 싶겠지. "

 

그리하여 제조상궁은 덕임을 세손의 곁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동궁의 서고에서 일하게 하고 동궁이 배우는 학문을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야.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점차 세손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있단다…….  그리 생각하며 웃었겠지.

 

덕임이 어찌나 예쁜 짓만 하는지 참으로 기특했을 것이다. 저렇게 자신의 뜻이 올곧고 그것을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아이가 또 있을까. 스스로 임금을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왔으니 얼마나 영특할까. 역시 너를 고른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허나 네가 내 일을 그르칠 순 없으니 주상께 허튼 말은 하지 말고 얼굴만 비추고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타일렀다. 

 

 

" 나는 너를 세손 저하의 후궁으로 올리고 싶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궁녀들을 위해 …  "

 

너를 어떻게 만들어, 어떻게 쓸지 두고 보라지 않았니. 나는 준비가 끝났고 너의 대답만이 남았구나. 그렇게 조씨는 다시 한번 덕임의 턱을 어루만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세손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람을 세손의 후궁으로 만들고자 하다니. 자신이 통솔하는 700여 궁녀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사람인 덕임을 사지에 몰려는 것이 아닌가? 겨우 보험으로 두었다가 때가 되면 버릴 병정으로 쓰는 것인가? 이는 분명 내세웠던 명분이 잘못되었거나,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순간 악인의 서사에 감동했던 나를 후회했다. 그저 뒤틀린 욕망이었다. 원인과 결과가, 근거와 논리가 맞지 않았는데 그저 '사도세자의 아들을 증오하는' 이유가 드러났다는 것에 감격하여 동조했다. 작가는 그런 나의 뒷통수를 때리듯 제조상궁의 실체를 드러냈다.

 

궁녀들을 지키기 위해 성군을 택한다는 대의 명분. 그래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금상이 보위에 오르기 전이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수년을 지나며 그 명분은 탁해졌고 궁녀를 통솔하는 스스로의 책임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욕망에 더 깊이 빠져버린 것이다.

 

내 눈에는 그런 제조상궁의 모습이 사내의 연정을 탐낸 아둔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질투에 눈이 멀어 벗과 그의 낭군을 음해한 것이 아니다. 결과는 그랬을지 몰라도 그저 분노한 미치광이의 행태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그렇지. 타당한 악은 없다.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을 깨닫고 보니 그동안 놓쳤던 것들이 보였다. 조씨는 홍정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에 홍정여를 잠시 끼워준 것처럼 보였고. 

 

"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달에 사는 선녀라 칭송해 주며 항아님이라 불러주지. 전설 속 항아가 사는 달의 궁궐, 광한궁. 그곳이 얼마나 쓸쓸한 장소인지 그 누가 알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지켜줘야 해. 우리가 믿을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명심하게. "

 

광한궁의 언급은 이미 4화에서 나왔다. '그곳이 얼마나 쓸쓸한 장소인지 그 누가 알까.' 이미 제조상궁 조씨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뒤틀린 상태였던 것이다. 

 

조씨의 뒤틀린 심리는 광한궁 장면에서 반영된 것 같았다. 장면, 장면이 모두 묘하게 틀어진 각도처럼 느껴졌는데. 멀리서 보면 올바르게 보이는 것도 가까이 다가가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제조상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 것 아닐까.

 

같은 회차에서 산의 얼굴은 이렇게 정면으로 담아주었는데 말이다.

 

유난히 두드러지는 촛불을 볼까. 제조상궁의 뒤에는 4개, 덕임은 단 하나의 촛불이 놓여있다. 겉모습 뒤로 감춘 개인의 욕망은 덕임보다 조씨가 더 많다는 뜻이겠지. 나를 흔드는 바람에 그 불빛이 쉽게 꺼진다면 마음은 어둠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 보이는 덕임의 머리 위에 놓인 촛불. 마음이 흔들려 모든 불이 꺼지더라도 더 높게 빛나는 신의는 남을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제조상궁이 아무리 일을 도모하고, 사람들을 꾀어내려 애쓰고, 어려운 시험에 들게 해도. 결국 이 아이의 손을 캄캄한 먹으로, 모두 뒤덮을 수는 없을 것이며

 

동쪽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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