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그의 눈물은 그녀의 눈물처럼 떨어졌다.

다보아 2021. 12. 13. 00:58

 [옷소매 붉은 끝동] 09 - 10화의 이야기

 

우리 사랑은 어찌 이리도 아릴까

 

그 순간에는 우리의 마음이 같았다. 서로를 원한다는 마음. 누군가는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누군가는 누군가에 안도했다. 그렇게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은 국본도, 궁녀도 아니었다. 

 

덕임은 산의 품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감히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분과 껴안고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덕임은 아무 말이나 내뱉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허둥거리는 덕임으로 인해 물동이까지 덜거덕 혼란한 소리를 내었다. 산은 그녀의 온기가 남은 손과 제 품을 내려다본다. 갑자기 멀어진 온기는 뭉툭한 칼등 같아서 아프진 않았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늘 덕임 보다 넓은 보폭으로 앞서 걷던 산이었다. 하지만 제 품에서 도망친 덕임을 쫓아가 붙잡기는 싫어 한발 물러나 천천히 덕임을 따랐다. 내 곁을 떠나 무얼 하나 지켜볼 마음으로. 신호연을 핑계 삼아 말을 돌리는 덕임이 괘씸했다. 그래서 다 외워버리라 아이처럼 성을 냈다. 그러니 덕임은 한술 더 떠 위험하면 제 뒤에 숨으라 한다. 

 

그제야 산은 덕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섰다. 널 내 한품에 안고도 남는데, 어떻게 너의 뒤에 숨을 수 있겠느냐. 참 우습지도 않다고 따지고 싶었겠지. 너는 여전히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서. 더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이제야 찾은 너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다짐도 내보였다.

 

"답해 보아라, 내가 널 어찌할까"

 

"그날 저하를 만났던 일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고, 소인은 저하가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어린아이 둘이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그 만남에 의미를 두실 필요가 있습니까."

 

덕임은 그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면 더 슬플 것 같았다. 우연이 아니라면 정말 제조상궁 조씨의 뜻대로 된 것 같았으니까. 차라리 우연이었다면, 우연히 만난 것이 당신이었다면 더 좋겠다 느껴지지 않았을까. 덕임은 아직 굴레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너에게는 그 만남이 아무 의미도 없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대답에 다른 말은 붙이지 못하고, 제 손만 잡았다 놓는 산의 열망이 분명 덕임에게 닿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덕임의 진심은 산에게 닿지 않았다. 덕임은 제가 더 상처 받은 눈빛으로 산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제 마음을 할퀴듯 산에게 상처를 주었다. 결국 애먼 제 손만 꼭 잡아 비틀어 마음을 다스렸다.

 


 

산이 모르는 덕임의 순간

 

복연은 홍 겸사서를 바라보는 마음만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또 절대 외롭거나 비참해지지 않는다 말한다. 꿈으로 부푼 복연의 얼굴을 바라보니 덕임의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연모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복연이 저리 웃는 걸 보면 연모한다는 건 분명 기쁜 감정 일터. 헌데 제 사랑은 왜 이리도 슬프고 어려운 걸까.

 

덕임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 마음이 사랑이 맞는지 확신을 갖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분명 산이 신경 쓰이고 그의 말 한마디에 날을 지새울 만큼 모든 마음이 곤두서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 특별한 감정일까? 그저 주인을 모시는 종의 마음은 아닐까. 

 


 

덕임이 모르는 산의 순간

 

편전에서의 일로 화가 가시기도 전에 침전에서 무언가 보였다. 이불을 깔 필요가 없다 소리치려던 참이었다. 설마 덕임일까? 이 순간에도 덕임에 대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산이었다.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으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겁도 없이"

 

제 눈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덕임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덕임이 깰까 싶어 모든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이 아이를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만질 수 없었다. 너무도 귀하고 소중해서, 제 손이 닿아 닳아 없어질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더 웃음만 나왔다. 이 아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쩔쩔매는 제 모습이.

 

산은 좌익위에게 덕임이 있는 방을 지키라 명했다. 혹여 덕임이 깨어났을 때 제가 옆에 있으면 당황할 모습이 그려져서였을까.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되었을 텐데 잠든 덕임이 옆에 있는 채로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어서였을까.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느낀 순간

 

동궁의 약포가 강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모였다. 저하께 알려야 했다. 달려가기엔 너무 늦다. 해서 신호연을 날렸다. 부디 저하께서 발견하시길 바라며. 

 

하늘에서 신호연이 보였다. 맞붙어 싸워라. 저 연을 날린 이는 분명 덕임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무기조차 충분하지 않았지만 산은 살아남아야만 했다. 물러설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저를 지킬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만 한다.

 


 

쓰러진 자객의 복면을 벗기니 여인이다. 또 다른 자객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분명 지척에서 나를 보필하는 궁인이렸다. 싸우다 몇 번이고 넘어졌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산은 그렇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이미 늦었을지 몰라. 이미 잃었을지 몰라."

 

눈물이 쏟아졌다. 발이 퉁퉁 붓고 힘이 빠졌지만 달려야 했다. 그분을 봐야 했다. 이렇게 그 사람을 잃을 수 없었다. 총성까지 들리니 더 두려웠고 그 불안감은 더 열심히 달려갈 이유가 되었다.

 


 

 

덕임은 힘이 남지 않아 주저앉아 버렸지만 늦지 않게 산이 덕임을 받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쏟아내다가는 눈물도 함께 쏟아질 것 같아 이상한 말만 나왔다. 그저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아무 말이었다. 덕임은 늘 그랬다. 산의 뒤를 밟아 기방까지 쫓아갔을 때에도. 제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보다 산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컸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마음 귀퉁이에 재밌는 말을 꺼내 산이 웃게 했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넘기기기에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런 덕임의 마음을 눈치챘다. 하여 지켜주겠노라고 쉬어도 좋다 말하니 바로 눈을 감는 덕임. 여태 정신력으로 버텼구나. 이다지도 여린 네가, 이리도 강인하게 버텨주었구나. 의식의 끊을 놓은 덕임은 잠든 아기처럼 산의 품에 누워있다. 

 

"그 신호연을 보았을 때 너일 줄 알았다. 너일 수밖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얼굴은. 제발 한 번만 더 보게 해 달라 애원했던 얼굴은. 너였다. 덕임아."

 

그의 눈물은 그녀의 눈물처럼 떨어졌다. 품에 안은 그녀를 어루만지는 산의 손길에 애절함이 묻어난다. 자신을 지켜주겠다 해맑게 웃던 너를 비웃어서 미안하다고. 정말로 나를 지켜주어 고맙다고. 내가 너를 힘들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이리 무사히 돌아와 내 품에 안겨 쓰러진 너를 사랑한다고. 그 모든 말을 삭힌 채 그저 그녀를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으니 편히 쉬라고 알려주듯 줄곧 어루만졌다. 그때 하늘의 달은 보름의 짐을 비워내고 있었다. 다시 차오를 보름을 위하여…….

 

잠시만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허나 버티기에는 덕로의 말이 퍽 아팠다.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과 일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덕임을 서상궁에게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이렇게 너를 두고 가는 내 무거운 마음을 알아줄까. 네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겨우 살아 돌아왔다. 힘들게 도착한 궐에서 마주한 할아버지는 산에게서 호부만 빼앗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줄 생각조차 없었다. 임금이 나가면서 산에게 남긴 것은 자신을 둘러싼 금군이었다. 그 순간 산은 절망했다.

 


 

산의 이궁이 결정되고 덕임은 다시 서고로 배정되었다. 아마 신이 동궁 내관에게 미리 지시해둔 일이겠지. 서고의 창문을 열면 저 너머 저하가 보일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그분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눈앞에 그분이 계신다. 꿈을 꾸는 걸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따라 웃게 된다. 역시 꿈일까 싶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가 보고 싶다.

 

갑작스럽게 이궁을 명 받고도 덕임이 보고 싶었다. 하여 덕임이 있을 서고로 온 것이었다. 역시 이 녀석은 일은 안 하고 또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런 덕임을 보고 있노라니 또 웃음이 스며 나왔다. 덕임은 산을 웃게 만든다.

 

이번에는 정말 산이었다. 버선발로 뛰어와 그를 확인했다. 정말 그가 맞는지, 정말 무사한 것인지. 흐르던 눈물을 닦는 것도 까먹고 그를 바라보는 덕임이었다.

 

"보고 싶어"

 

너도 나와 같았구나. 산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덕임의 눈물을 보니 산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렸다. 닿기 어렵던 덕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고이 감쌌다. 귀중한 옥구슬처럼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었느냐 물었지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녀의 입으로 날 염려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진심을 듣고 싶었다.

 

산은 덕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네가 나를 원한다 하면 나를 줄 수도 있었는데 너는 고작 천리경을 말하더구나. 덕임은 저 멀리 빛나는 달을 보듯 산을 보았다. 천리경으로라도 왕세손인 산과 궁녀인 자신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겠지. 천리경을 핑계로 산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제가 어딜 보고 있는지 산이 알아차릴 수 없게. 그날 다시 차오른 달은 보름달이었다.

 

오해가 아니었으면 했다. 너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다고 생각한 내가 맞았다고. 더는 아닌 척하지 마라. 너를 그렇게 두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덕임은 다시 물러났다. 사랑한다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막았다. 그저 무사히 보위에 올라달라고, 그것이 소원이라고.

 

덕임은 또다시 산이 보위에 오르는 그날까지 제 마음을 미뤄두려 했다. 그때까지 제가 산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없이 다짐하고 되뇐 일이었다. 마음을 한껏 뭉쳐 숨겨둔다 해도 점점 커져가는 사랑은 그 틈을 비집고 나올 텐데 말이다. 산은 또 그렇게 물러나는 덕임에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고백과 수많은 거절이 오갔으니 이번에도 언제나처럼의 거절이라 생각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덕임의 거절은 늘 아팠다.

 

"부디 무탈하시옵소서"

 

돌아서 가는 산의 뒷모습에 진심 하나가 툭 흘러나왔다. 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덕임의 사랑이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정말 작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산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더 필요했던 커다란 진심이었다. 역모의 밤, 숱한 죽을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자신을 마음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염려한 사람은 덕임이 유일했다. 그 순간 덕임이 숨겼던 진심은 들켜버렸다.

 

순간 너무나 벅차서 당장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듣고 싶었던 어여쁜 말을 꺼내 준 그 사랑스러운 입술에. 하지만 덕임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럴 수는 없었다. 또 제 마음의 부피가 커서 감출 수도 없다.

 

마음을 누르고 눌러 담아 겨우 덕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가가며 잠시 머뭇 거렸던 것은 오직 제 마음이 너무 빨리 다가가 덕임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덕임은 놀라지 않았고, 산의 입맞춤을 받았다. 덕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평소보다 강했지만 아프지 않았다. 제 이마에 닿은 산의 입술이 더 뜨거워서 그랬으리라.

 

당분간 볼 수 없어 네가 아주 많이 보고 싶겠지만. 부디 잘 지내다오, 내가 너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저하께서도 부디 무탈하시옵소서. 소인이 저하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도록. 서로에게 준 상처와 받은 상처가 씻은 듯 사라진 밤이었다. 그 밤은 보름달이 두사람을 비추고 바람 한 점 없는 아늑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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