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15화까지의 이야기
산과 덕임의 갈등 (3) 산과 덕임의 사랑
덕임은 보잘것없는 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후궁이 되면 여태껏 궁녀로서 살아온 제 삶이 모두 사라지고,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자신이 산에게 내줄 모든 것을 산이 내어주는 모든 것으로 채우고 싶어질까 봐. 그 사람의 전부를 가질 수 없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다짐했다.
덕임의 사랑도 산의 사랑 못지않게 열렬했다. 복연을 보면 알 수 있다. 복연은 홍덕로의 마음을 모두 갖고자 하지도 않았다. 또 그 어떤 기대도 맡겨두지 않아 그에게 실망할 일도 없었다. 그저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복연은 행복해했다. 어쩌면 복연이 옳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어찌 가늠하겠는가. 전부랄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정말 종이 상자를 채우는 일과 같다면 한 번 구겨진 종이 상자는 돌이킬 수 없다. 변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덕임의 생각처럼 말이다. 하지만 감정은 겨우 상자 따위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 무량하다. 그러니 변해버렸다고 단정 지을 수도, 변해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다고 단념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을 하고서도 그 마음을 꺼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원빈의 일만 해도 그랬다. 덕임은 그저 어린 소녀가 가여워, 산에게 그녀를 보살펴달라 말했을 뿐이지만 산은 그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녀의 동무들에게 조차 덕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오롯이 가지려 하지 않는 덕임에게 서운했다. 원빈은 아직 어리다 해도 여인이었고, 심지어 산의 후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을 보내려 하니 저를 사내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질 밖에.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서로에게 나눌 수 없었기에 서로의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틈은 산과 덕임이 제각각의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은 두 사람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의 선택에 상처받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할퀸 것은 원망 탓이었다. ‘네가 정말 밉지만 나는 너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러니 너라도 나를 미워하고 밀어내라’ 따지는 책망.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한 생각인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상대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이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상대라고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것이라 착각했다. 서로가 없으면 겨우 숨만 쉬며 버틸 것이면서 ……. 그렇게 서로를 떠난 채로 1년이 지났다.
덕임은 산을 다시 볼 수 있음이 좋아서 간청을 올렸다. 이렇게 당신을 다시 봐서 좋다고. 하지만 당신은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 명하셨고, 그 명을 어길 수는 없으니 당신이 나를 잊어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당신이 나를 잊어 종종 이리 발걸음 해 내가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음을 숨겨놓고 말이다.
산은 덕임이 조금만 다가오면 언제든지 명을 거두어 다시 곁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예전처럼 자신을 웃게 만들며 슬그머니 다가와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숨기며 꺼내는 덕임의 말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마음을 읽지 못해 애써 내려온 이곳에서까지 덕임에게 성을 냈다.
그 모습에 덕임도 화가 났다. 제 뜻을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겨우 산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산의 배려였음을 알아 더욱 비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큰 벌이라도 내려달라 소리쳤다. 당신을 보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더 멀리 내쳐달라는 뜻이었다. 당신을 지울 수 있게, 제대로 원망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저항으로 말이다.
산은 덕임의 옷고름을 잡고 그녀를 겁주었고, 덕임의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차마 볼 수 없어 떠났다. 겨우 그럴 거면서 그렇게 서로를 할퀴고 자기 자신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다시 마주한 서로의 시선에 1년 동안 겨우 쌓은 마음의 둑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니 서로가 원망스러웠겠지. 겨우 잊었다 생각했는데 모조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다시 만난 서로가 너무 괜찮아 보여 더 분했다.
서로를 향한 원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다시 만났다. 누군가의 지아비로,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산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덕임. 그렇게 사랑하는 덕임을 문 앞에 세워두고 다른 여인과 함께 밤을 지내야 하는 산. 겨우 이런 꼴이나 보려고 돌아왔나. 겨우 이런 꼴이나 보여주려고 돌아왔나. 또 풀지 못한 원망만 쌓였다.
덕임이 미웠다. 겨우 떠나보냈더니 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용서할 수 없었다. 보모상궁이 아닌 다른 궁녀들의 목욕 시중이라도 받겠다 결심할 만큼 모든 마음을 비우고, 연정일랑 모두 잊고 그저 이 나라의 왕으로만 살고자 했는데 다시 나타나 자신을 흔드는 덕임이 괘씸했다. 그래서 또 덕임을 찔렀다.
산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덕임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덕임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저처럼 덕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덕임이었다. 저 때문에도 그렇게 울었을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여범에 숨겨둔 금서의 조각에 대해 물었다. 덕임은 또 다른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산은 이제야 덕임이 감추는 진짜 말을 읽어냈다. 너였구나.
역시 덕임을 제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상처 주었던 일을 되돌리고 싶었다. 모두 왕으로서 내린 결정이었으니 사과할 수는 없었다. 사과한다는 것은 후회한다는 뜻이고, 후회한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으니, 임금이 되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 겨우 다시 덕임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가 피하는 것처럼 느껴져 완전히 마음을 거두고 돌아가려 했다.
그 찰나 덕임은 그 순간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생각을 건너뛰고 두 손이 먼저 움직였다. 꿈에서 조차 닿을 수 없는 존재인 산이었지만 그의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냈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 사랑이었다. 변하는 것이 두려워 피하는 것보다 함께 살아있는 것이 더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궁녀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려 한다. 변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 단 하나.
피처럼 붉은 곤룡포의 옷자락에, 임금의 여인임을 나타내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겨우 닿았다.
Da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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