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13화의 이야기
해서 내가 너를 흔든다.
간밤에 큰일이 있었다. 역당이 궐에 침입해 주상전하를 해하려 했다. 심지어 그 무리에는 덕임과 어릴 적부터 친했던 월혜가 가담해 있었다. 월혜에 대한 원망과 산을 향한 걱정이 모두 한 데 모여 덕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산이 상갓집 개 같다며 쿡쿡 찌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를 향한 걱정에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산은 그런 덕임을 가만 보기 어려웠다. 덕임은 차라리 화라도 내라는 산의 말을 들으니, 저까지 전하의 근심에 보탬이 되었나 싶었다.
내기를 하기로 했다.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기. 덕임은 바로 복연이 떠올라 좋아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가지 얻을 수 있다는 점에 기뻤다. 그리고 산은 후궁이 되어달라 말했던 것에 대한 대답을 원했다.
덕임은 먹먹했다. 이제는 대답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덕임은 이기고 싶었다. 제 동무 복연이가 다시 궁으로 돌아 올 수 있게. 혹여 지더라도 산에게 들려줄 대답은 이미 정해두었기에 그 내기가 힘들지 않았다.
산은 이기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덕임의 마음을 조금은 확인 하고 싶어, 그 안에 내가 있는지 알고 싶어 일부러 질문을 꺼냈다. 나보다 동무들이 더 소중하냐고. 나는 너의 동무들에게조차도 너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산의 그 마음을 들은 덕임은 돌을 제대로 던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덕임의 그런 반응을 보니 산은 알 수 있었다. 너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구나.
복연이 돌아왔다. 고맙다 말하는 덕임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산도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서로 바라보고 웃을 수만 있는 시간이길 바랐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산에게는 지금 짊어진 무거운 과제가 있었고 덕임은 몰랐다.
다시 한 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나도 당신을 염려하고 있다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가벼운 말이 산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슬퍼졌고 마음이 버거워졌다. 산은 이렇게 평범한 말 한마디조차 편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 스스로 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늘 두려웠던 덕임이었다. 겨우 산에게 도움이 될 조언을 했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으니… 그러니 더더욱 산의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잔뜩 취한 채 돌아왔다. 서상궁은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했지만 곧바로 내금위장이 귀뜸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니 서상궁은 바로 산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덕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잔뜩 풀어진 산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꼭 살리고 싶었는데, 결국 아우를 죽였다. 그 마음을 풀어낼 곳이 없어 술을 마셨다. 잔뜩 취해 세상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세어 나왔다.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게 될까, 그저 웃으면 웃을 수 있는 일이 될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너도 간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제가 내보냈지만, 덕임은 스스로 나가버렸던 게 마음에 남았나보다.
덕임은 산을 위해 꿀물을 가져왔다. 그렇게 덕임이 내민 꿀물을 받아 마시는 산. 산이 이토록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덕임은 산이 안타까워 애처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저 괜찮냐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덕임과 퍼질러 앉은 산, 덕분에 산이 덕임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때마침 하는 말도 덕임을 향한 원망이었다.
별당에서도 너를 기다렸는데 너는 오지도 않고. 이렇게 나를 피하는구나.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네 애정을 갈구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너만은 달라야지.
너만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어야지.
헌데 너마저 나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 어떡하느냐.
내 곁에 있는 것이 꺼려져?
해서 나에게서 자꾸 멀어지려 하느냐?
그렇게 덕임을 책망했다.
덕임은 궁녀로서 자신이 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무력해지고 있었다. 그저 그 벽 앞에 멈춰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은 그런 덕임의 눈에서 두려움만 읽었다. 그 두려움은 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저를 향한 것이었는데. 제가 산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산이 더 힘들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한 사람은 여인으로 다가와주길 바라고, 또 한 사람은 여인으로 다가가길 망설이니 서로의 마음이 엇갈릴 수밖에.
꽉 잡힌 손을 놓아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산이 덕임을 놓아주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기억도 못 할 거면서 나를 이렇게 흔들지 말라는 애원이었다.
하지만 산은 기억을 못할 테니 너를 흔들겠다 말한다.
자꾸 멀어지려는 덕임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걸 잊어도, 너는 똑똑히 기억하라고.
오늘, 이 밤을 기억하고 계속 나를 생각하라고.
이 순간이 너에게 불을 지피고,
네 마음을 뒤흔들길 원한다는 욕망이었다.
그렇게라도 네 마음에 내가 있길.
그렇게라도 네가 나를 떠올리길.
그게 힘들어서라도
결국 네가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산은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런 그를 보듬으며 덕임은 숨죽인 채 눈물만 흘렸다.
산은 덕임의 거절이 아니라, 그 말을 제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것에서 화가 났다. 제게 직접 거절을 했어도 되었을 일을 남에게 전해 듣도록 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물론 그것이 덕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기에 덕임을 탓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밝은 빛이 놓여있다.
산은 화를 누르고 덕임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아가 치밀어 그녀의 목을 휘어잡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덕임은 자신이 후궁이 되길 원치 않는 이유를 말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테니 당신을 갖지 않겠다고.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여인을 붙잡을 도리가 없었다. 또 모든 것을 줄 수 없지 않으냐 묻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재간도 없었다. 산은 이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덕임을 붙잡을 수 없는 산이었기 때문에.
산이 덕임을 두고 나가버리자. 덕임은 작은 틈에 갇혀있었고, 그녀를 밝게 비출 빛이 그 밖에 놓여있다.
혼자 남은 그녀에게 빛이 닿으려면, 그녀가 그 작은 공간을 벗어나든지 산이 그 공간 안으로 빛을 들고 찾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은 어도에 서있고, 덕임은 그 밖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차이는 이토록 분명하다.
네가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그렇게 산이 발을 내디뎠지만.
결국 그 턱을 넘지 못했다.
Da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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