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왕과 궁녀의 벌어진 틈

다보아 2021. 12. 27. 23:24

[옷소매 붉은 끝동] 15화까지의 이야기

 

산과 덕임의 갈등 (1) 왕과 궁녀의 벌어진 틈

 

 

푸르렀던 어린 시절 두 사람은 만났고. 인고의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산은 조선의 왕이 되었고, 덕임은 그런 그의 옆에 항상 머무는 대전 나인이 되었다. 두 사람의 세월은 함께한 영역과 각자의 영역이 공존했는데 두 사람의 갈등은 그 틈에서 시작했다.

 

덕임은 궐에 사는 여인들의 생존법을 배웠고, 산은 임금이 일을 결정하는 방식을 배웠다. 궁녀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 한낱 종에 불과한 자신의 삶을 견뎌내며 배웠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임금은 할 수 있는 일 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다. 대부분의 선택과 결정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같았고, 그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되레 체념만 쌓였다.

 

 

두 사람은 늘 서로를 원했고, 서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변화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빠르게 일었다. 산의 시간은 나라를 위해 조정에서 쓰였고 덕임의 시간은 그런 산을 위해 쓰였다.

덕임은 변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많이 변한 것은 덕임이었다. 덕임이 변했던 것은 두 사람의 틈이 만든 그 시간을 오로지 여관으로서 쓰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궁녀로서 산을 보필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들의 대부분을 여인으로서 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되뇌면서 말이다.

산을 보필하는 것이 궁녀 성가 덕임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산이 보위에 오른 이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적어졌다. 사실 그렇게 느끼는 것 마저 산을 향한 사랑이었다. 궁녀의 일을 다하면 그뿐일 텐데, 그것만으로는 산을 돕는다고 할 수 없다 생각했고 오히려 무력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렇게 혼자 남는 시간이 쌓일 때마다 덕임은 할 말을 마음 깊은 곳에 감추는 버릇이 생겼고, 산은 그런 덕임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산은 변하지 않았다. 보위에 올라 얻은 권력, 또 그보다 많아진 책임과 책무가 그를 짓눌렀지만 괜찮았다. 산은 오히려 조정의 일보다 덕임의 일이 더 어렵고 힘들었다. 덕임을 곁에 두고 싶은데 덕임은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임금으로의 삶은 평생에 걸쳐 배웠지만 평범한 필부로의 삶은 배운 적도 꿈꿔본 적도 없기 때문에 어려웠다.

 

 

 

덕임의 시간과 산의 시간이 다르게 쌓인 이유는 분명했다. 산은 나랏일을 하며 덕임을 사랑했으나 덕임은 산을 위해 일하며, 산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덕임의 일과 사랑에는 '이산'이라는 한 존재밖에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덕임의 사랑은 어려웠다. 덕임에게 산은 닿을 수 없이 높은 하늘과 같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산인지, 자신이 모셔야 하는 군주인지 확신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월이 쌓이며 분명해졌지만, 그 세월은 산의 애정을 피하며 스스로 쌓은 세월이라 불안정했다.

그래서 더 동무들이 소중했다. 그들과 웃고 떠는 시간만이 산을 향한 마음을 접어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산과 덕임, 그들의 주변 사람들은 각각의 부피와 밀도가 달랐다. 덕임에게는 소중한 몇 사람이 전부였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지만 산은 조선 땅 모든 백성이 그의 사람이었고, 모두 공평하게 그들을 신경 써야 했다.

사내가 왕이라서, 여인이 궁녀라서 벌어진 틈이었다.

 

 

 

그동안 임금의 시간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궁녀 덕임이 모르는 사이, 산은 많은 이들을 죽여야 했다. 할아버지는 해야 할 일을 하라셨지만 쉽지 않았다. 친아우를 죽인 날 밤, 술에 기대 그 슬픔을 지우려 했으나 쉬이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왕의 무게가, 비울 수 없는 슬픔이 버거웠다. 그래서 더욱 덕임을 원했다. 덕임은 산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덕임은 산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다. 

 

분명 산은 덕임 또한 제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대하는 덕임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거절했고, 늘 제 마음을 모르는 척 피했다. 그렇게 쌓인 세월과 수많은 거절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덕임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그라들게 했다. 쉽게 가질 수 있었지만 함부로 대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덕임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하지만 '애초에 날 사랑하지 않았나, 날 사내로 보지 않았던 것인가' 의심하게 되니 마음의 화가 되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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