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15화까지의 이야기
산과 덕임의 갈등 (2) 왕과 궁녀의 선택
월혜의 일을 겪으며 덕임은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이 오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의 등극 이후 자신이 알던 산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홍 도승지를 용서하는 모습에서도 그랬다. 산은 일개 궁녀들의 목숨이 아닌 총신 홍덕로 한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산이 왕으로 살고 있는 순간을 직접 겪지 못했던 덕임은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우를 죽이고 힘겨워하는 산에게,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꿀물을 바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더욱 궁녀로서 제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왕의 방식은 모질었다. 그 결정을 따라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결정을 내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랬다. 임금의 일은 때를 찾는 것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때,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때. 해서 산은 모든 일을 알면서도 기다렸다.
힘없는 왕세손이었던 시절 보위에 올라 수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견디고 참았으나. 임금이 되어서도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궁녀들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을 알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임금이었다.
덕임은 그 사정을 알지 못했다. 산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마음은 매 순간 급해졌다. 경희는 제 가족이었다. 서상궁을 위해 광한궁의 연판장을 찾아 헤맸던 그날처럼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대비의 말에서 조차 임금이 궁녀들을 그저 소모품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텄다. 궁녀인 자신을 지킬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결국 그것은 제조상궁 조씨가 광한궁을 이끌며 주입했던 사상과 다를 바 없어서 더 괴로웠다.
분명 두 사람은 서로를 믿었다. 서로를 위했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지는 않아서. 가만두면 믿음의 영역이 흐려지기 쉬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오랜 시간, 한 사람은 사랑을 애원했고 또 한 사람은 그 사랑을 모른 채 피했다. 사랑은 머리로 이해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믿음과 사랑 모두 나를 믿는지,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되는지, 당신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채울 수 있는 종이 상자 같았다. 텅 빈 종이 상자는 쉽게 구겨진다.
그래서 덕임과 산의 관계에 놓인 상자가 구겨진 것이었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믿지 않으면 솔직할 수 없다. 왕으로서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지 못하는 순간 산은 분노했고, 궁녀로서 제 목숨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듯한 지존의 모습에 덕임은 절망했다.
모든 실망에는 기대가 선재한다. 기대한 바가 있어야 실망할 수 있고, 기대한 것이 클수록 실망도 커진다. 산은 덕임만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실망했다. 덕임은 산이 자신들을 지켜줄 군주임을 믿었기에 실망했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원망하기만 했다.
Da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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