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12화까지의 이야기
산이 정의한 덕임의 존재
산은 줄곧 덕임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 마치 빛처럼,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말이다. 덕임을 향한 직진은 자신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운명이 이끄는 대로 그 아이를 만났고, 본능적으로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면서 산의 마음은 점점 깊어지고, 산에게 덕임이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가 무거워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산의 마음을 찬찬히 짚어볼까.
1. 궁녀
그 시작은 이름도 모를 한낱 궁녀였다. 제 얼굴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 동궁의 궁녀라고 큰 소리나 치는 성가신 아이.
친히 내어준 닷냥을 집어던지질 않나. 내가 먼지도 아니고 빗자루로 쓸어버리질 않나. 그래도 뭐 돈에 쉽게 넘어오질 않는 걸 보니 제법 괜찮은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이 아이를 속였다. 멋대로 오해한 건 덕임이지만, 정정해주지 않았던 건 산이었다. 이렇게 들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를 바라보는 덕임의 원망어린 눈빛이 마음에 찌르르 울렸다.
사흘을 기다렸고 겨우 만났는데, 이제 고개도 들지 않는다. 역시 신경쓰인다. 여전히 이 녀석은 성가시다.
나는 동궁의 주인이다. 너는 동궁의 궁녀이니, 너의 주인은 나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말랬더니, 아예 눈 앞에 들어와 자꾸 나를 방해한다. 신경 쓰여. 역시 신경 쓰여.
군졸이 장수 대신 결정을 하더냐?
오늘은 처음이라 시선이 갔을 뿐이다.
늘 옆에 있다면 결국 보아도 보이지 않게 되겠지.
어차피 넌 수많은 궁인들중 하나일 뿐이고.
조금도 대수롭지 않아.
일을 잘하고 쓸모만 있으면 그만이지.
2. 여인
산은 덕임을 여인으로 인식한다. 고맙다고 말하며 덕임에게 웃어 보이고, 너와의 시간이 특별했다고 말했다. 아직 제 마음을 다 알진 못했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모두 하고 보니 고백 같았다.
덕임에게 할 말이 아니었는데, 궁녀는 미천한 여인이라고 하는 말을 덕임이 들었다. 저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덕임을 보니 제 마음이 베인 듯 아팠다.
3. 나의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가장 처절했던 순간을 들켰는데 오히려 저를 지켜주겠다고 맹세를 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정말로 저를 위해 애쓰는 덕임을 보니 고맙고 웃음만 나왔다.
너는 이제 내 사람이다. 내 사람은 내가 지킬 것이다.
덕임이 산을 사모한다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마구 뛰어 혼자만 남은 연못가에서 마음 껏 웃었다. 너도 내 마음과 같았다니, 너에게는 숨기지 않고 말하고, 다 보여줄 수 있겠다.
너에게는 자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싶어.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4. 나의 것
처음 마주한 연정은 지독했다. 그 아이만 보면 모든 감정이 격앙된다. 넌 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빌어먹을 푸른색 토시가 거슬려. 그래서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너였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이가. 다시 만나서 기뻤고 너도 같아 보여 덜컥 안았다.
도망치듯 떠나가더니 다시 한 발 물러나 선을 긋는다.
나는 너를 놓을 생각이 없는데 내가 널 어찌할까.
5. 오직 너
죽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때 덕임이 떠올랐다. 덕임은 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제 마음은 산과 다른 척 하지만 산은 이미 알았다. 덕임도 나와 같다는 걸.
더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렇게 온 몸으로 떨고 있구나. 괜찮다 덕임아.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내가 돌아올 곳은 너 뿐이니까.
함께하는 별당, 그 공간의 온도가 예전과는 다르다. 덕임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처음 하는 말들이 툭툭 나온다.
제 불안감이 덕임에게 닿을까 쓸데 없는 말이었다고 둘러댔지만. 역시나 그 마음은 덕임에게 빠르게 닿아버렸고, 덕임은 저만의 방식으로 산을 웃게 했다. 언제나 그랬듯.
덕임의 손을 마음 대로 잡을 수는 없어 애먼 강아지만 쓰다듬었다.
6. 확신
계속 너를 좋아한다고 수없이 표현했는데. 덕임은 자꾸 아닌 척 군다. 무슨 말만 하려 하면 못하게 하고. 그렇게 물러서면서 산에게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던 아이였다.
그랬던 덕임이 산의 손을 잡았다. 산을 염려하는 마음이 너무 커 그를 향해 무턱대고 손을 내밀었다. 부서질 것 같아서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고 잠깐이라도 안으면 도망이나 치던 그 아이가.
그러다 또 밀어내려고 한다. 괜찮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
참 오래도 걸렸다. 정리할 일이 너무 많아서 너를 보살피지 못했는데도 너는 늘 내 곁에 있었지.
이제는 더 미루기 싫다. 요즘 자꾸 덕임이 멀어지려는 것 같아서 붙잡아야겠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널 내 곁에 두고 싶다고 말이 나왔다. 그렇지, 너는 원래도 내 곁에 있었는데 … 그게 그러니까 여인으로 있어달라는 말이었거든?
후궁이 되어달라는 말이었다.
후궁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덕임은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막는 것도 아니고. 싫다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생각해보라는 내 말에 알겠다고만 답하는 네가 이상해 한 번 더 붙잡고 싶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
이번엔 너를 마주 보고 제대로 말할게.
Daboa
'REVIEW >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임은 착각했고 산은 뒤틀렸다 (1) | 2021.12.26 |
---|---|
너도 나처럼 흔들리면 좋겠다. (0) | 2021.12.25 |
제 아이 덕임이와 가족이 될그그등요 (일기) (0) | 2021.12.22 |
동요하는 물결에 꽃잎은 속절없이 (0) | 2021.12.21 |
빠르게 흐르고 두텁게 쌓인다 (0) | 2021.12.20 |